지식의 공간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던 직업이 사라지고 있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리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정보를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를 연결하던 공공의 문화적 허브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서관 사서가 존재해왔다. 사서는 단지 도서 정리나 대출 업무만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보를 안내하고, 질문에 응답하며, 때로는 정서적으로 이용자를 배려하는 감정 노동자였다. 그러나 최근 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서가 수행하던 다양한 역할이 기계로 대체되면서 도서관의 풍경은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무인 대출 시스템, 챗봇 안내, 자동 분류와 검색 기능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사서의 존재는 점차 배제되고 있다. 이 글은 AI가 도서관 사서의 업무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지고 있는 ‘감정 노동의 가치’를 조명하며, 공공성과 인간성을 잃어가는 도서관의 미래를 재조명한다.
AI 도입으로 자동화된 도서관 운영 시스템
오늘날의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은 점점 더 ‘사서 없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도서관은 무인 대출반납기를 도입했고, 키오스크 기반의 도서 검색 시스템은 이용자의 질문을 대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부 도서관은 AI 기반의 음성 인식 안내 시스템이나 챗봇을 통해, 이용자의 문의에 실시간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화책 중 초등 3학년 수준의 역사 관련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AI는 메타데이터 기반으로 자동 추천 리스트를 생성하며, 위치 정보까지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은 정보 접근성과 편의성 측면에서 분명 진보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자동화가 사서가 제공하던 세심한 배려와 감정적 소통을 함께 지워내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사서는 책을 단지 추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용자의 수준, 성향, 표정, 말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화하듯 안내했다. 지금의 AI 시스템은 그런 정서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편리해진 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억에 남는 안내’는 사라진 것이다.
사서의 감정 노동이 가지던 가치: 단순한 직무 그 이상
사서가 수행하던 업무는 겉으로 보기엔 반복적이고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높은 수준의 ‘감정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낯선 공간에 들어온 아이에게 눈을 맞추며 말을 걸고, 독서가 처음인 노인에게 조심스레 책장을 권하고, 장시간 책을 찾느라 지친 학생에게 친절하게 위치를 안내하는 일은 매뉴얼로는 할 수 없는 ‘사람의 일’이었다.
사서는 이용자의 요구를 파악하기 위해 비언어적 단서를 해석해야 했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불안한 감정으로 들어온 이용자를 진정시키며 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특히 어린이실, 장애인 도서관, 치매전문자료실 등에서는 더욱 섬세한 감정적 소통이 요구되었다.
이런 역할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을 넘어, 공공 공간에서 사람의 존재를 실감하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AI 시스템은 이런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다.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안내는 기계적 정확성은 가질 수 있어도, 인간적인 배려는 결여될 수밖에 없다.
감정 없는 도서관: 공공 공간의 해체와 이용자의 소외
AI가 도서관 운영의 많은 부분을 효율적으로 바꾸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공공의 인간적 경험’이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서가 사라진 도서관은 점점 더 자기주도 학습 공간, 정보 검색 기기, 조용한 창고로 변해가고 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기계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노인, 어린이, 외국인, 발달장애인, 디지털 문맹 계층은 키오스크나 챗봇에 대한 접근 장벽을 크게 느낀다. 이들에게 사서는 ‘정보 관리자’이자 ‘심리적 중재자’였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자신의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무인기 앞에서 조용히 돌아서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도서관 내 정적인 분위기는 더욱 강화되며, ‘사람과의 교류가 있는 지식의 장’이라는 본래의 공공성은 퇴색되고 있다. 이용자는 서비스를 받는 주체가 아닌,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용자로 전락하며, 도서관은 점점 더 개인화된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사서의 새로운 길: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공공성과 인간성 강조
AI 기술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사서의 모든 역할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사서의 ‘감정 노동’과 ‘인간적 소통’의 가치를 재정의할 기회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서의 역할은 기술과 공존할 수 있다:
① 감정 중심의 안내 서비스 운영
기계가 제공하지 못하는 정서적 공감, 맞춤형 소통, 비언어적 배려 중심의 안내 서비스를 강화하면 사서는 기술과 차별화될 수 있다.
② 독서 상담자 및 큐레이터로의 진화
이용자의 관심사와 성향을 파악하여 장기적인 독서 계획을 제안하거나, 삶의 단계별로 필요한 책을 추천하는 큐레이션 서비스는 여전히 사람만이 할 수 있다.
③ 디지털 정보 격차 해소 조력자
노령층, 외국인, 장애인 등 디지털 접근이 어려운 계층을 대상으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정보 접근 가이드, 기기 사용 도움을 제공하는 역할은 AI보다 사람이 훨씬 효과적이다.
④ 공공의 문화 플랫폼 기획자
사서는 이제 도서관을 정적인 공간이 아닌, 문화·교육·예술을 기획하고 연결하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전환하는 조력자가 될 수 있다.
기술이 비우는 자리에, 사람의 존재 이유가 더 또렷해져야 한다
AI 기술이 도서관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공공 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만이 아니다. 사람이 느끼는 배려, 소통, 정서적 안전감이 빠진 지식 전달은 오래가지 못한다. 도서관 사서의 감정 노동은 단지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도서관이 ‘공공의 공간’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핵심이었다. 지금은 사라지는 역할을 아쉬워할 때가 아니라, 기계가 할 수 없는 진짜 사람의 역할을 정의하고 확장해야 할 시간이다. AI가 책의 위치를 알려줄 수는 있어도, 그 책이 누군가에게 왜 필요한지를 함께 고민해 줄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역할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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